♠ 인물 분석
표도르 카라마조프 | 일생동안 탐욕적이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아 온 지주. 인색하고 시기심이 많으며 정욕의 포로이자 극도의 이기주의자이다. 그의 인생관은 극히 부정적이기 때문에 그는 인생의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 육체적 쾌락을 목적으로 삼으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재산을 축적한다. |
드미트리 카라마조프 | 야성적이고 순수한 성격. 그루세니카라는 여자를 두고 아버지와 싸움. 왕성한 생활력과 강렬한 정열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직한 마음과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서로 모순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동요한다. |
이반 카라마조프 | 지성을 갖추었으나 무신론적인주장을펼치며,하인스메르쟈코프의 사상에 영향을 줌. 교활하고 탐욕스러우면서도 이지적인 면을 지닌 무신론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극단적인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
알료사 카라마조프 | 순진한 예비 수도사.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사라고 불린다. 그는 종교적 순결성과 정신적 무구성(無垢性)을 대표하는데, 그의 곁에는 종교적 달관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조시마 장로가 있다. |
♠ 인간의 문제
• 현실이란 인간과 신, 인간과 악마의 관계이며, 현실이란 인간이 그것에 의해서 살아가는 관념이다. 인간 정신의 분열, 이것은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본질적인 테마를 이루고 있지만, 현실적인 해석 방법에 맡기지는 않는다. 이반의 두 개의 ‘자아(自我)’가 밝혀지는 스메르쟈꼬프와의 관계를 그린 그 천재적 묘사를 가리켜 ‘사실주의적’이라 말할 순 없다. 이반과 악마와의 관계 묘사는 더구나 그렇다. 도스토옙스끼를 사실주의적 심리학자라고 부를 순 없다. 그는 심리학자가 아니라 정신학자이며 상징주의적인 형이상학자다. 그에 있어 의식적인 삶의 저편에는 항상 무의식적인 우주가 숨어 있고, 여기에 그의 예언자적인 예감이 결부되어 있다. 인간을 결합시키는 것은 의식의 밝은 대낮에 보이는 관계나 고리뿐만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생(生)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신비적 관계나 고리도 있는 것이다. 도스또옙스끼에 있어 다른 세계는 언제난 이승에 사는 인간들의 관계와 연관을 맺고 있다. - 이반 카라마조프와 스메르쟈꼬프
• 도스토옙스키는 그리스도에의 길을 무한한 자유를 통하여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무한한 자유의 길에 기만적인 인신(人神)(반그리스도)의 유혹이 또 잠재해 있음을 폭로하였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신의 발견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단지 휴머니즘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그 내적 폭로, 그 파멸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이름은 니체의 이름과 동열(同列)에 놓지 않으면 안 된다. 도스토옙스키와 니체의 이후로 옛날의 합리주의적 휴머니즘에의 복귀는 불가능하다. 휴머니즘은 극복되었다. 인간의 휴머니즘적 자기 긍정과 자기 충족은 도스토옙스키와 니체에서 그 종말을 보게 된다. 앞으로의 길은 신인(神人)이 아니면 인신(人神), 즉 초인(超人)으로 가는 길이다. 인간은 이미 인간으로 만 남아 있을 수 없다.
니체는 인간을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며 초인으로 전향한다. 그러므로 휴머니즘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의지(自意志)와 지기 긍정의 마지막 한계는 초인 속에서 인간의 파멸로 나타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신화(神化)가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인간의 자의(恣意)의 길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다른 지식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인간 신화(神化)의 무지(無知)를 밝혀 내었다. 그는 정신의 예언자였다. 그에 반해 니체는 초인의 관념에 지배되어 그것이 그의 속에서 인간의 관념을 말살해 버렸다. 도스토옙스키는 끝까지 인간을 보호한다. 인신(人神) 속에서는 인간이 파멸하지만 신인(神人) 속에서는 보호한다. 인간의 상(像)을 영원히 보존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는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신을 살해하는 것은 동시에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 된다. 신과 인간(그리스도교는 신인(神人)의 종교다), 이 두 개의 위대한 관념의 묘지 위에 신과 인간을 살해하는 괴물의 상이 스스로 신이라 칭하는 인간 미래의 초인, 반그리스도의 상이 나타난다. 니체에 있어서는 신도 인간도 없고 오직 미지의 초인만이 있을 뿐이다.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신도 인간도 있다. 신은 절대로 인간을 잡아먹지 않는다. 인간은 신 속에서 소멸하지 않는다. 인간은 최후까지, 영원히 인간으로 남는다.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깊은 의미의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신적인 삶의 제일 심연에까지 잠입하려고 한다. 인간은 영원의 심연에 속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전작품은 인간에 대한 변호이다.
그가 끝까지 인정하는 것은 하나의 본성(本性)---인적(人的) 혹은 신적(神的)---이 아니라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두 개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그의 종교적․인간학적 관념과 비교해 볼 때 러시아의 정교나 가톨릭의 관념도 단성론(單性論)의 경향을 띠고 있고, 인간성을 신성(神性) 속에 흡수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세계 역사상 그 어떤 사상가도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인간관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최후의 인간, 가장 무서운 인간의 타락 속에서 신의 모습을 확보한다. 그러나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도주의적인 사랑은 아니었다. 그는 이 사랑 속에 무한한 동정과 어떤 잔인성을 혼합한다. 그는 인간에게 고뇌의 길을 예고한다. 그것은 그의 인간학적 사상의 중심에 자유의 관념이 함유되어 있음을 말한다. 자유가 없으면 인간은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도스토옙스키는 인간과 그의 운명에 대한 모든 변증법을 자유의 운명의 변증법으로 전개한다. 그러나 자유의 길은 고뇌의 길이다. 이 고뇌의 길을 인간은 끝까지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가 인간에 대해서 발견한 것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자유와 악에 대한 그의 연구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 자유의 문제
• 도스토옙스키는 욕정이나 사악한 관념에 사로잡힌 인격의 타락과 쇠퇴를 묘사하는데 대단한 수완을 발휘한 작가이다. 그는 악령에 사로잡힌 상태의 존재론적 제결과(諸結果)를 연구한다. 방종한 자유가 집념에 타락할 때 자유는 파괴되고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광란의 상태에 빠지기 시작한 인간은 이미 자유가 없다.
• 자유의 문제에 관한 도스토옙스키의 탐구는 [카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 속에서 그 정점에 달한다. 이반 카라마조프의 자의지(自意志)와 반역은 은총을 잃은 인간의 자유가 걷는 길의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의지로서, 자기 긍정으로서의 자유는 신과 세계와 인간뿐만 아니라 자유 그 자체도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도스토옙스키는 비상한 천재력으로 여기서 보여준다. 자유는 자기를 파괴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유의 빛이 미치지 못하는 어두운 길목 끝에 자유의 결정적인 파괴와 사악한 강제와 사악한 필연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 자유는 자의지가 되고, 자의지는 강제로 타락한다. 이것은 숙명적인 과정이다. 인간 정신의 자유, 종교적 양심의 자유는 자의지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 의해서 부정된다. 자의지와 자기 긍정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인간, 그 자유로 신에 대항하려는 인간은 자유를 보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득이 그것을 침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은 그 정신의 우위와 그 원시적 자유를 버리지 않을 수 없으며, 이것을 필연의 왕국에 희생물로 바쳐 가장 심한 강제에 떨어지게 된다.
• 도스토옙스키는 자유를 통해서, 인간 정신의 자유를 통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가 말한 정신의 자유를 부정하는 사람은 신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그 역도 성립된다. 선과 정의가 강제적으로 지배하는 세계, 그 조화가 부정하기 어려운 필연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세계는 신이 없는 세계이며, 합리화된 기계 조직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신과 인간 정신의 자유를 부정하는 사람은 세계를 합리적인 기계 조직으로, 강제적인 조화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유의 문제를 정적(靜的)이 아니라 동적(動的)으로 처리한다. 그의 자유 변증법적 운동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그 속에서 내적(內的) 모순이 드러나고 그것은 다시 여러 가지 국면으로 옮겨간다. 때문에 정적인 사고력과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도스토옙스키의 자유에 관한 위대한 발견은 이해되기 어렵다. 그들은 ‘가(可)’와 ‘부(否)’를 요구하지만, 거기서 그 대답을 얻어 낼 수는 없다. 자유는 인간과 세계의 비극적 운명이다. 그것은 근원적인 신비로서 존재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 악(惡)의 문제
•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모든 소설 속에서 인간에게 자유와 악과 속죄의 과정을 밟게 한다. 그는 조시마 장로와 알료샤를 악을 아는, 높은 상태에 달한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 알료샤 속에는 카라마조프 가(家)의 피가 흐르고 있고, 이것을 형 이반과 그루센까가 다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알료샤 자신도 이것을 자기 내부에서 느끼고 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생각으로는 알료샤는 자유의 시련을 겪은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경로를 통하여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운명을 이해하여 왔다. 범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모든 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허용될 수 있는가? 이 테마는 항상 도스토옙스키를 괴롭혀 온 문제이며, 이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그에게 나타난다.
[카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 역시 대부분 이런 문제를 취급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 시련을 보여 준다. 인간은 자유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인간의 본성에는 도덕적 한계가 있는가, 인간은 무슨 짓을 해도 좋은가? 자유가 자의지(自意志)로 타락할 때 그것은 이미 성스러운 것을 모르고 제약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고 인간 자신이 신이라면 모든 것이 인간에게 허용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신이 되기 위하여 그의 힘, 그의 능력, 그의 일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인간은 어떤 관념(觀念)에 사로잡혀 이 과념의 지배하에서 자유는 소멸하기 시작하고 인간은 외부의 힘의 노예가 된다. 이런 과정을 도스토옙스키는 천재적으로 묘사하였다. 자의(恣意) 속에서 자유의 한계를 모르는 자는 자유를 상실하고, 자기를 노예화하는 관념에 빠지고 만다.
• 이반 카라마조프는 분열하고 분할된 인간이다. 그는 인격의 통일성을 잃고 이중생활을 한다. 분열이 극단에 이르면 다른 자아(自我)가 인간에서 분리되어 내적인 악의 상징---악마로서 인격화되기 마련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분열의 극단을 천재적인 힘으로 이반 카라마조프의 악몽, 사탄과 그와의 대화 속에 묘사한다. “너는 나 자신의 화신이지만 나의 단 일면의 화신……나의 사상과 감정, 그 가운데서도 가장 추하고 가장 애매한 것의 화신이다.” “너는 나 자신이면서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너는 나와 다를 게 없다. 너는 나일뿐,,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는 나의 환상이다.” 도스또옙스끼의 악마는 ‘불의 날개를 가지고 시뻘건 빛 속에서 천둥소리를 울리고 빛을 번득이면서, 나타나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악마는 아니다. 그는 희끗희끗한 반백의, 노예근성을 가진 저속한 신사로서 '1백 킬로그램이 넘는 거대한 상인'이 되고자 한다. 이것은 인간을 기다리는 허무의 정신이다. 악이 극단에 이르면 저속하고 허무하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분열된 인간의 제2의 ‘자아(自我)’는 허무의 정신이며 인격의 파멸을 보여 준다. 이 제2의 ‘자아(自我)’ 속에는 공허하고 내용이 없는 자유, 무(無)의 자유가 나타난다. 분열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제2의2 자유, 은총의 자유, 진리 속의, 그리스도 속의 자유에 있다. 분열이 끝나고 악마의 악몽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선택, 진정한 존재의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도스토옙스키의 사랑이 이 같은 분열을 거쳐 그 속에서 같은 요소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 사랑의 문제
•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적 변증법에 따르면 자의는 자유를 파괴하고 자기 긍정은 인격을 파괴한다. 이러한 자유와 인격을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은 ‘자아’보다 높은 원리 앞에 겸허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격은 사랑과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이 사랑은 타인과의 결합을 지향하는 사랑이다. ‘자아’에 폐쇄된 사랑은 탐닉을 낳고 인격을 파괴한다. 동정의 심연---이것은 사랑의 다른 극이다---은 입을 벌린다. 동정은 인간의 인격을 구출하지 못하고 관능의 악마에서 그것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동정 속에 광적인 관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동정은 타인에의 도피, 타인과의 융합이 있을 수 없다. 관능과 동정엔 두 개의 영원의 요소가 있으며, 그것 없이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정열과 연민은 다 같이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서 완전히 합법화되고 정당화된다. 이 두 개의 요소는 무엇보다도 신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신 속에서 하나로 융합함으로써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참다운 사랑이다.
• 기독교적 사랑에 있어서는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의 형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신의 모습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모든 개인의 신의 아들의 권리를 인정한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제일의 계율이다. 그 다움엔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능한 것은 신이 존재하고 공통의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 각자 속에 있는 신의 형상, 신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신이 없다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신으로 숭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때 인간을 집어삼키고 인간을 자기 도구로 만드는 인신(人神)의 모습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사랑 없이 인간에 대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이반 카라마조프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비그리스도적 인간애는 거짓된 기만의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초인의 관념은 인간을 말살하고 신인(神人)의 관념은 인간을 영생(永生)에 이르도록 강화한다. 따라서 도스토옙스키가 주장하는 진실한 사랑은 영원성의 긍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