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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부인전(竹夫人傳)
작품의 이해와 감상
▶ 이 작품은 대나무를 의인화하여 현숙한 여인의 모습과 여인의 정절에 대하여 서술한 글이다. 먼저 죽씨의 가계(家系)를 들어 조상의 훌륭함과 후손이 뛰어났음을 말하였다. 이는 후대 고대 소설이 주인공의 출생을 미화하는 방법과 유사하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주인공은 어려서부터 정숙하였으며, 지조 높은 군자와 결혼한 뒤에는 더욱 강직하고 깔끔하게 생활을 하다가 남편을 잃은 뒤는 절개를 마쳤는데 나라에서 알고 포상하였다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유교 사회에서의 여성의 한 이상형으로서 열녀의 표본을 내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후세에 많이 발생한 열녀전류(烈女傳流)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 고려 말 이곡이 대나무를 의인화하여 절개 있는 부인에 비유하여 쓴 가전체 소설. 한문본. <동문선> 권101권과 <가정집>에 전하고 있다. 주인공 죽부인은 이름이 빙(憑)이고, 위빈에 사는 은사운(왕대)의 딸이다. 그 선대에 문적과 가까이하여 사관이 되고 특히 문인과 친교가 있었다. 서두에는 죽부인의 소개와 그의 선조가 음악에 조예가 깊어 당시에 발탁되어 우대를 받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바로 악기로 사용된 제구(製具)가 죽부인이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퉁소처럼 당시 사회에서 우대를 받아 온 것이다. 진나라가 학정함에 창랑의 후손은 숨어 지냈고, 한나라 때의 문도는 저생과 같이 놀았다. 주나라 때의 간(竿)은 태공과 더불어 위빈에서 낚시질하며 곡직(曲直)을 충직하게 간하였다. 총각인 의남이 음사(淫詞)를 지어 죽부인을 희롱하였으나 정숙한 그는 절개로써 물리치고 드디어 부모의 권고에 따라 송대부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송공은 선유(仙遊)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으므로 위풍을 때때로 노래하였다. 그러다가 청분산에 집을 옮겨가 고갈병이 나서 치료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여 늦도록 절개를 지키며 살았다. 저자는 성리학의 영향으로 삼강오륜을 역설, 의를 바탕으로 한 충. 인에 입각한 효를 논하여 충효론을 주장하였다.
이 작품은 당시 음란한 궁중과 타락한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점차 절부(節婦)가 드물어져 감을 한탄해서 지은 것이다. 음란한 노래의 사회적 병폐를 지양하는 뜻에서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죽(竹, 節婦)을 대상으로 하여 부인의 높은 절개를 표하여 반증한 것이며, 구성과정이 변(왕대)의 음률을 통하여 조정의 전악관의 악서에서 퉁소의 후손을 두고 있는 것은 순탄한 권선적인 완전구성이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연구 문제
1. 이 작품이 소설이 될 수 없는 이유는?
▶ 가전은 소설과 같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작품이다. 그러나, 가전은 중국 문헌에 나온 사실들을 주 소재로 삼아 주인공의 행적을 서술하고 있다. 소설은 일관된 줄거리를 통해 주제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한다. 가전과 소설의 근원적 차이는 바로 이 줄거리의 유무에 있다.
2. 죽부인이 주는 교훈은?
▶ 어떤 시련과 고통에도 의연하게 살아가는 인간상과 정숙하고 절개 있는 여성상을 칭송하여 당대의 타락한 사회에 경종을 울림
3. 글의 흐름상 모순되는 것은?
▶ 처음에는 죽부인이 운의 딸이었으나 나중에는 당의 딸로 나오고 있다.
본문 읽기
부인의 성은 죽(竹)이요, 이름은 빙(憑)이다. 위빈(渭濱, 위수의 물가)사람 운(운, 왕대나무)의 딸이다. 그의 가계는 창랑씨(蒼랑氏, 대나무의 의인화)로부터 시작한다. 조상이 음률을 잘 해득하였으므로, 황제가 그를 뽑아서 음악의 일을 맡아 다스리게 했다. 우(虞)나라 때의 소(簫, 퉁소) 역시 그 후손이다.
처음 창랑은 곤륜산(崑崙山) 남으로부터 동으로 옮겨 와서, 복희씨 때에 위(韋, 가죽)씨와 함께 문적에 관한 일을 보아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자손 대대로 모두 사관의 자리를 맡아왔다.
진(秦)나라는 포악한 정사를 하였다. 이사(李斯, 진시황제의 신하)의 계략을 받아들여 모든 책들을 불사르며 선비들을 묻어 죽였다. 이렇게 되자 창랑의 자손들은 점점 한미(寒微, 변변치 못하게 됨)해졌다. 한 나라 때는 채륜(蔡倫, 후한 때 종이를 만든 이)의 문객 저생(楮生, 종이)이 글을 배워, 붓을 가지고 때때로 죽씨와 함께 놀았다. 그러나 그 위인이 경박해서 남 헐뜯기를 좋아했다. 죽씨의 그 강직한 모습을 싫어하여 몰래 헐뜯다가 마침내 죽씨의 소임까지 빼앗아 갔다.
주(周)대에는 간(竿, 대나무 장대)이 있었으니, 또한 죽씨의 후손이다. 태공망(강태공)과 더불어 위수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는데 태공이 갈퀴를 만들었다. 간(竿)이 내가 들으니 훌륭한 낚시꾼은 갈퀴를 만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낚시꾼의 크고 작음은 곡직(曲直)에 있으니, 곧은 것은 나라를 낚을 것이요, 굽은 것은 고기를 얻는데 불과할 것입니다. 라고 했다. 태공이 그의 말을 좇아 뒤에 과연 문왕의 스승이 되어 제(齊)에 봉해졌고, 간의 어짊을 천거하여 위수가에 식읍을 마련해 주니 이것이 죽씨가 위수가에 살게 된 유래이다. 당(당)이 익모(益母, 익모초)의 딸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곧 죽부인이다. 죽부인이 처녀 때에 정숙한 자태가 있었다. 그 이웃에 사는 의남(宜男草, 원추리)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음탕한 노래를 지어 떠보니 부인이 노하여, 남녀가 비록 다르나 그 절개는 한가지인데, 한 사람에게 꺾었다면 어찌 다시 세상에 서 있겠는가? 라고 하자 의남은 부끄러워 달아났다. 그러니 어찌 초동이 넘볼 수 있었으랴.
다 성장하자 송대부(松大夫, 소나무를 의인화한 것)가 예로써 청혼하니, 부모가 송공은 참으로 군자이다. 평소의 지조가 우리 집과 서로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라고 하며 마침내 시집보냈다.
부인의 성질이 날로 곧고 두터워지니, 혹시 어떤 일에 당하여 분별할 때는 빠름이 마치 칼날로 쪼개는 것과 같으며, 비록 매선(梅仙)의 믿음이나 이씨(李氏)의 말없음도 일찍이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으니, 하물며 귤로(橘老)나 행자(杏子, 살구)에 있어서랴. 혹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이 되어 바람을 읊고 비를 노래할 때에는 그 말쑥한 자태를 무엇으로 형용하기 어려워 호사가(好事家)들이 슬그머니 그의 얼굴을 그려 전하면서 보배로 삼으니, 문여가나 소자첨 같은 이들이 더욱 그것을 좋아했다.
송공은 부인보다 나이가 18세 위인데, 늦게 신선의 학술을 배워 곡성산에 노닐다가 돌로 변하여 돌아오지 못했다. 부인이 홀로 살면서 이따금 위풍으로 노래하였는데 그 마음이 절로 흔들려 지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성품이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역사에 전하지 않지만 오월 열 사흗날 청분산으로 집을 옮겼다. 술에 고갈병을 얻어 드디어 고치지 못하게 되었다. 병을 얻은 뒤로는 사람을 의지하여 살았고, 나이가 들면서 절개가 더욱 굳어져 마을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그녀는 또 삼방의 절도사 유균이 부인과 같이 살았다. 그녀의 행실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져 임금은 절부의 직함을 내렸다.
사씨(史氏)는 말한다.
죽씨의 조상은 상고 시대에 큰공을 세웠고, 또 그 자손들은 모두 재주가 있고 절개가 굳어서 세상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니 죽부인이야말로 어질다 하겠다. 아! 이미 군자를 짝하여 남의 의지함이 되고도 마침내 후사(後嗣)가 없었으니 하늘이 무지하다 함이 어찌 헛된 말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