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영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 표현
백낙청은 <풀>에서 ‘소리의 울림’과 더불어 ‘의미의 울림’을 지적하여 풀과 민중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염무웅은 서로 만들어 가던 역사를 위한 군중성의 체험이나 민중적 체험은 비로소 <풀>을 통해 획득하게 되며, 이것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회가 되었다고 논하고 있다.
김현은 <풀>의 핵심은 바람/풀의 명사적 대립이나, 눕는다/일어선다, 운다/웃는다의 동사적 대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풀의 눕고 울음을 풀의 일어남과 웃음으로 인식하고, 날이 흐리고 풀이 누워도 울지 않을 수 있게 된 풀밭에 서 있는 사람의 체험이다. 그것을 이해하게 되면 시인이 왜 12행에 리듬상의 변주를 부여했는가 하는 이유를 곧 알 수 있게 된다”라고 주장하며 <풀>을 “그의 정신 편력의 한 극점”으로 읽고 ‘풀’을 민중의 상징으로 읽는 읽기를 거부한다고 말하고 있다.
김종철은 “그러나 우리가 이 시를 단순한 알레고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풀을 반드시 버림받은 인간으로만 번역하여 읽을 필요는 없다…… 풀의 ‘웃고, 울며, 일어나고 웃는’ 실존의 모습에 주목하여 그것이 결코 딴 존재에 의하여 대체될 수 없는 독자적인 개성으로 존재하는 생명임을 확인한다. 이것은 예컨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에서 ‘더 빨리’ ‘먼저’라는 표현이 말하고 있다. ‘더 빨리’나 ‘먼저’라는 표현은 행위하는 주체자의 자유로운 의지를 전재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뜻에서, 이 작품은 풀 또는 풀이 상징하는 존재의 자유를 노래한 시”라고 <풀>을 읽고 있다.
[가]연-----과거형
[나]연-----현재형
[다]연-----미래형
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김수영이 이 한 편의 시를 통해 우리나라의 역사를 통찰하고 예시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⑵행의 “동풍”이 “東외세”가 된다는 점인데 이것은 {민중}과 {외세}로 보지 않았을 때와 관련이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김수영의 작품에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외세는 주로 미국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위치가 우리 나라의 東쪽에 위치해 있고 그러한 측면에서 ‘비를 몰아오는 동풍’이라고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풀>에서 나타나는 ‘동풍’은 자연현상의 ‘비를 몰아오는 동풍’이 아니고, 문학적 의미의 상징성을 가진 ‘고난을 몰아오는 외세의 압력’이라 봐야 한다. 그리고 ⒅행의 “날이 흐리고 민중뿌리가 눕는다” 역시 고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앞서 ‘누워도/울어도’에서 ‘--어도’는 선행되는 행위와 무관한 행위의 독자성을 주장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 된다고 했다. 또 그러한 행위가 “일어나다”, “웃는다”라는 행위와 결합될 때 분명 수직적이며 개방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편으로는 “눕는다”, “울다”가 수평적이고 폐쇄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논의의 의미를 결정짓는 단서는 되지는 못한다. 이 이차성은 풀의 행위이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풀이 눕는다”라는 반복체계는 설명될 수 없다. “풀이 눕는다”라는 전제로부터 귀결되는 풀의 시학은 결국 “풀뿌리”라는 근원과 본질을 획득하는 존재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을 단순한 이차성의 행위로 보지 말고 문학적 의미로 보았을 때는 ‘누워도/울어도’의 의미가 ‘일어나고/웃는다’를 받쳐주듯이 ⒅에서 ‘날이 흐리고’는 ‘--어도’의 반복적인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문법을 파괴하면 ‘날이 흐리고’는 ‘날이 흐려도’로 해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설의 의미에서 ‘풀(민중)뿌리가 눕는다’는 앞서 반복적으로 나타난 효과에 의해 ‘풀(민중)뿌리가 일어난다’가 된다. 그러므로 ‘날이 흐려도’는 ‘풀(민중)뿌리가 일어난다’를 바쳐주는 것이 된다. 김수영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풍자의 의미는 이처럼 ‘누워도/울어도’의 부정적인 의미를 앞서 설정한 다음에 그 뒤에 ‘일어나고/웃는다’를 감추어 놓음으로 해서 전면에 내세운 부정이 안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내적 울림’에 의해 풍자의 깊이를 더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풍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김지하는 ‘諷刺냐 自殺이냐’에서 “우리 시대의 시인은 무엇보다도 민중의 거대한 힘을 얻고 스스로 민중 또는 군중으로서의 자기긍정에 이르러야 하는데 김수영의 풍자는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민중적 자세가 모자랐기 때문에 표현의 면에서 민요 및 민예 속에 무진장 쌓여 있는 풍성한 자원을 활용하지 못했다”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김수영 시인이 민요나 민예 속에서 자원을 활용하지 못했다고 해서 풍자 시가 아니라고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반면 백낙청은 ‘시민문학론’에서 “김수영이 난해성과 단편성, 또는 완전히 극복 안된 소시민성조차도 우리는 그가 이 시대를 정말 자기 것으로 산 흔적으로 아끼게 된다. 갑자기 중단되어 버린 김수영의 작업은 이미 우리 시대의 가장 성실한 증언과 미래의 시민의식 시민문학을 위한 가장 보람 있는 지표를 마련해 놓았다. 이는 60년대는 시민문학이 완성될 기반이 없는 시대요 소시민의식과 소시민적 현실이 엄연히 지배하는 시대에서 김수영이 이루어 놓은 업적이다. 이 현실을 제대로 증언할 수도 없었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한 점에서 김수영의 <풀>은 시대를 뛰어넘음과 동시에 시대를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얘기했다. 이처럼 <풀>이라는 작품은 많은 논자들에게 많은 소재와 논쟁거리를 가져다주었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시인의 ‘내적 울림’의 풍자정신은 그 누구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순수시로의 해석도 가능하고, 민중시 혹은 참여 시의 해석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이 시는 곧 시인의 시세계를 대변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시인은 자신의 시가 순수나 참여에 의해서 해석되기보다는 시가 지니고 있는 ‘내적 울림’을 통해 작은 것들의 위대한 힘을 역설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미래를 희망차게 열어갈 수 있을 거라는 의지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의 외침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다. 마치 시인의 삶처럼 부정인 듯하면서 긍정의 모습으로 전이되는 ‘내적 울림’을 바탕으로 보다 큰 세상을 풍자하는 외침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풀>은 시를 머리나 마음이 아닌 온몸으로 써 내려가면서 썼던 시인의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최후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김수영 시인이 남긴 작품들 가운데 높이 평가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황동규
<기항지 Ⅰ> 걸어서 항구(港口)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碇泊) 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港口)의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
<즐 거 운 편 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 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 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 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 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姿勢)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 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 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 시의 회화성
현대시에서는 직접적인 이미지의 제시보다는 상관물의 통한 이미지의 상호 결합에 의해서 정서와 사상이 효과적으로 표출되는 특성을 보인다. 스케치풍의 묘사로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서정적 자아의 감정이나 사상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로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한 형태이지만, 거기에는 기술적이고 의도적인 간접적 암시와 대조 비판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항지’는 정착하여 살고 있는 생활 근거지나 고향이 아닌 ‘임시로 들른 곳’이다. 이국적 또는 지방적인 사물의 묘사와 선택된 풍경들에 의하여 이 시는 그 신선한 문학성을 지닌다.
이 시는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로 시작한다. 이후의 풍경들은 모두 항구에 도착한 ‘나’의 눈에 비친 풍물이거나, 나의 행동이 그 전부인 것이다. 바람과 불빛, 육지를 향해 거북선의 거북처럼 고개를 들고 있는 배, 눈송이와 새 등 을씨년스러운 항구의 공간이 비쳐져 있다. 언어로 그린 항구의 모습인 것이다. 그것들은 대부분 시각적인 운율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항구의 풍경이긴 하지만, 담담하고 침착한 묘사 속에는 한 편의 아름다운 단편 소설을 읽고 난 뒤의 영상처럼 매우 상징적인 이미지들로 충전되고 건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시의 예리한 충격의 감동인 것이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용골들이~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등 선택된 세부들이 독특한 뉘앙스를 풍기며 신선한 매력을 주는 것이다.
♠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낄쭉대면서 우리들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
□ 시의 회화성
◆ 황지우의 경우 다양한 기법의 추구가 우선 주목된다. 그의 시는 시적 텍스트 자체를 해체시키는 데에서부터 주체를 해체시키는 작업까지 파장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경향과 다양한 실험적 기법에도 불고하고, 시적 정서의 포괄성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다.
◆ 1970년대의 시에서 민중시 운동이 부분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극단적인 이념 추구 방향이라든지, 순수시의 정서적 안일성을 그는 모두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황지우는 1970년대 시가 한때 빠져들었던 정서적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현실의 모든 문제를 폭넓게 포괄할 수 있는 언어의 힘을 일상의 현실 속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초월의 의지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비 맞으면 민물고기 냄새난다> 산길에서 비를 맞으면 온 몸에서 민물고기 냄새가 풍겨난다 갖잡아올린 팔뚝만한 잉어의 싱싱함처럼 나뭇잎 같은 옷들이 젖어들면 들수록 삶의 힘이 솟아나 거세게 팔딱여진다 자연의 넉넉함 속에 젖어가고 있기 때문일까 어린 날 한없이 불어나던 한탄강물 널찍한 바위 밑에 주낙을 놓으면 아버님이 좋아하시던 얼큰 장어가 바늘 밑에 주렁주렁 열리던 기억의 되살아남은 부서진 안전유리 버리지 못해 매달려 살아왔던 끈적한 도시 삶 힘이 들었다 아니라고 악바쳐 외쳐도 메아리되어 비수처럼 박히는 고통 얼마 큼을 온 것인지 모른 채 안개숲 헤치며 달린 길 고향도 과거도 그리움 실타래의 한 끝에 아슬하기만 하더니 실 가닥에 양초기름 맥이듯 팽팽히 날이 서는 추억들 넉넉한 강원도 소나무 숲을 오르다보면 황쏘가리같은 비바람마저 등을 토닥여 주고 벅차 오르는 숨조차 살아가는 기쁨의 환호성이 된다 자연의 폐 옆에서 숨소리를 만지기 때문일까 산길에서 비를 맞으면 온 몸에서 비늘 돋는 냄새가 풍겨난다 |
<한국 현대시를 읽으며> 보이즈 투 맨의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도심 한복판 서점에서 한국 현대시를 읽는다 귀는 음악을 쫓고 눈은 활자를 쫓고 정신은 이 둘을 접목시키려 하지만 귀는 오선지의 거미줄에 조여지고 눈은 몰운대 어딘가를 떠돌고 정신은 어느 것도 조합해내지 못하고 있다 저자의 약력과 출판사만으로 책을 이해하는 듯 옆 사람이 속독으로 책을 훑고 지나갈 때 음악은 락 앤 롤로 바뀌었지만 몰운대는 아직도 몰운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 현대시를 읽으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은 한국어로 쓰여졌기에 한국사람에게 읽혀지는 한 편의 시보다 세상은 난삽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키노라는 그룹과 레드제플린을 비교할 줄 알아야 음악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고 영어를 한국어처럼 말할 줄 알아야 지식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현실의 벽 앞에서 피곤에 지친 정신은 하품의 쓰레기인 눈물을 흘리며 정작 사야 할 Building skill for taking TOEFL을 찾고야 만다 그래도 전공이 국문인데 하는 미련이 시집의 두께보다 긴 시간을 버티게 하지만 저려오는 돈 때문에 영문원서만을 사들고 나오며 몰운대의 상징성보다는 몰운대의 영어식 표기를 떠올린다 |
♠ 두 작품 중에 한 작품을 선정하여 시의 분석과 감상을 1000자 내외로 쓰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