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적 이상주의
♠ <돈키호테(Don Quijote)>
영혼이 외부세계보다 좁은 경우 | ① 모험을 떠나는 문제는 개인의 마성적(魔性的)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의 내면적 문제성은 보다 덜 분명하게 나타난다. ② 영혼이 현실에서 겪게 되는 좌절은 언뜻 보면 마치 단순한 외면적 좌절처럼 보인다. ③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곧장 앞으로만 치닫는 내적 상태이고 또 마성에 현혹되어 이상과 이념, 보편적 정신과 개인의 영혼 사이에 존재하는 일체의 거리를 망각한 마음상태이다. ④ 현실이 이러한 선험적 요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경우에 현실은 사악한 마성적 힘에 대항해 용감히 싸움으로써 분쇄될 수 있고 또 구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
• 영혼이 외부세계보다 좁은 경우 영혼에 대응하는 행동과 저항은 그 규모나 질(質), 아니면 그 현실이나 방향에 있어 서로 아무런 공통점을 갖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과 행동의 관계는 서로 한 번도 진정한 의미의 싸움이 되지 못하고 단지 그로테스크하게 서로 지나쳐 버리거나 아니면 상호 간의 오해에 의해서 그로테스크하게 충돌해 버리는 관계밖에 되지 못한다. 즉 심리의 영역과 행동의 영역은 이제 더 이상 서로 아무런 공통점도 갖지 못한다.
• 그가 행동의 활동무대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외부세계는 자신의 영혼 속에 순전히 선험적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념과 동일한 이면과, 아울러 이념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유기적인 성격의 현실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는 세계이다.
• 이로부터 그의 행동은 자연발생적이면서도 동시에 이념적으로 될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세계는 삶으로 충만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유일한 본질적인 실체로 생생히 살아 있는 삶에 대한 가상(假像)으로도 충만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를 잘못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해서 그가 세계에 접근하자마자 그는 세계와 필연적으로 그로테스크하게 엇갈리게 행동하게 된다.
• 주인공의 영혼이 갖는 고립성은, 영혼을 일체의 외부적 현실로부터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아직도 마성에 홀리지 않은 영혼의 다른 모든 영역으로부터도 영혼을 분리시킨다. 이렇게 해서 도달되는 의미의 최대치는 최대치의 무의미가 된다.
• 주인공의 심리적 경직성과 제각기 유리된 일련의 모험 속에서 원자화된 무수한 행동은 상호 관련을 맺게 되고, 이의 결과로 이러한 소설 유형이 갖는 위험, 즉 ‘나쁜’ 추상성과 ‘나쁜’ 무한성의 위험이 전면에 분명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 소설의 역사철학적 위치
• 소설은 신에 의해서 버림받은 세계의 서사시이다.
• 소설 주인공의 심리는 마성적 성격을 띠고 있다.
• 소설은 내면성이 지니는 고유한 가치를 알아보려는 모험의 형식이다.
• 서사시의 모험은 내적 외적인 모험을 모두 견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었다.
• 서사시에는 신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돈키호테>가 지니는 역사철학적 의미
• 원래 기사 소설의 패러디로서 써졌고 또 이 소설이 갖는 기사소설과의 관계가 단순한 에세이적인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적 우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기사 소설은, 서사 형식의 선험적 제 조건이 이미 역사철학적 변증법에 의해 생겨난 뒤에는 순전히 형식적 수단을 통해 하나의 형식을 유지하고 지속시키고자 했던 모든 서사 형식이 겪었던 운명을 마찬가지로 겪었다.
• 기사적 서사 형식 :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하나의 서사 형식을 가능하게 했고 또 요구했던 시대에 존재할 수 있었던 하나의 특이한 소설 형식이다. 기독교적 우주관의 최대의 파라독스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삶이 갖는 분열과 규범적 미완성, 방황과 죄악에 빠져 있는 지상적 삶에 대립해서 피안의 삶에서의 영원한 구원과 신정론(神正論)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 <돈키호테>에서 주관적으로 분명하고 광(狂)적으로 붙잡혀 있지만, 객관적 관계가 결여된 존재로 변하고 있다. 기사 소설의 경우 자신을 감싸고 있는 질료의 부적합성 때문에 단지 하나의 마성적 존재처럼 나타날 수밖에 없었지만, <돈키호테>에 와서는 실제로 하나의 악마, 다시 말해 신의 섭리로부터 버림받고, 선험적 좌표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감히 신의 역할을 하려는 하나의 마성적 존재가 되고 있다. 이제 그가 생각하고 있는 이러한 세계는, 이전에 신에 의해 위험스럽지만 근사하게 만들어졌던 마법의 정원과 동일한 세계이다.
• 이러한 세계는 이제 사악한 악마에 의해 산문적인 세계로 변함으로써 또다시 믿음이 충만한 영웅들에 의해 그 마법의 정원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고 있다. 한때 사람들이 동화의 세계 속에서 선한 마법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지키려고 했던 바는, 여기에서는 하나의 적극적 행동이 되고, 또 구원의 말만을 고대하고 있는 동화적 현실의 낙원을 찾기 위한 투쟁이 되고 있다.
♠ <돈키호테>의 문학적 의의
• 기독교적 신이 세계를 떠나려고 했던 시대의 문턱에서 태어난 최초의 위대한 소설이다. 이는 인간이 고독해지고 어디에서도 고향을 갖지 못한 영혼 속에서만 의미와 실체를 찾을 수 있게 된 시대이고, 현존하고 있는 피안의 세계에 역설적으로 닻을 내리고 있는 상태로부터 떨어져 나온 세계가 그 자체의 내재적 무의미성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시대이며, 기존의 힘이 지금까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커져서 새로이 등장하는 세력에 대항해서 격렬하면서 아무런 목적이 없어 보이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시대였던 것이다.
• 세르반테스가 살았던 시대는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위대한 신비주의가 마지막으로 꽃을 피웠던 시대이다. 그는 또한, 사멸해 가고 있는 종교를 그 내부로부터 재생시키려고 광적인 시도를 하던 시대, 새로운 세계인식이 신비적 형식 속에 등장하고 있던 시대, 실제 체험은 하고 있지만 이미 목적을 상실한 채 시도적으로만 무엇인가를 찾던 신비주의의 시대를 살았다.